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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리뷰/시와 글 19

나의 꿈 - 한용운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당신의 머리 위를 지키고 있겠습니다.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당신의 책상 밑에서 "귀똘귀똘" 울겠습니다.

오늘밤에도 - 김행숙

오늘밤에도 소년들 소녀들 전화를 한다. 오늘밤에도 하늘은 푸르스름하고 해는 떠오르지 않는다. 소년들 소녀들 오늘밤에도 총총하다.   낮에 소년과 소녀는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고, 아이스크림은 햇빛에 녹지 않고, 오늘밤은 아이스크림 같아서 달콤하다. 딸기 시럽같이 성수대교를 흘러가는 자동차들은 어디서   어디서 스르르 녹겠지. 12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소년은 전화를 한다. 난 달리지 않을 거야. 달려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덜컥,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   난 오토바이족을 동경하지도 않고 여자애를 엉덩이에 붙이고 싶지도 않아. 나는 무섭게 세상을 쏘아보지 않지. 그런 눈빛은 이제 아주 지겨워. 몇 명의 소년 소녀 오늘밤에도 머리를 너풀거리며 추락하고,   그 몇 초에 대해 오늘밤에도 명상하는 소년들 소녀..

기억의 자리 - 나희덕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다시 돌아올까 봐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길의 어귀마다 여름꽃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시든 꽃잎이 그만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기억의 자리마다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 김남주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아무리 아쉬워도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나지 못할 수 있다.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제각기 모두 제철을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혹 그 언제인가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밤처럼서로 속삭일 것이다.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어느 한 가슴에도메아리의 먼 여운조차남기지 못할 수 있다.그러나 삶의 노래가왜 멎어야 하겠는가이 세상에서... ...무상이 있는 곳에영원도 있어희망이 있다.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내가 어찌 마지막으로눈을 감는가.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 최승자

1어디까지갈수있을까 한없이흘러가다보면나는밝은별이될수있을것같고별이바라보는지구의불빛이될수있을것같지만어떻게하면푸른콩으로눈떠다시푸른숨을쉴수있을까어떻게해야고질적인꿈이자유로운꿈이될수있을까     2어머니 어두운 뱃속에서 꿈꾸는먼 나라의 햇빛 투명한 비명그러나 짓밟기 잘 하는 아버지의 두 발이들어와 내 몸에 말뚝 뿌리로 박히고나는 감긴 철사줄 같은 잠에서 깨어나려 꿈틀거렸다아버지의 두 발바닥은 운명처럼 견고했다나는 내 피의 튀어오르는 용수철로 싸웠다잠의 잠 속에서도 싸우고 꿈의 꿈 속에서도 싸웠다손이 호미가 되고 팔뚝이 낫이 되었다     3바람 불면 별들이 우루루 지상으로 쏠리고왜 어떤 사람들은 집을 나와 밤길을 헤매고왜 어떤 사람들은 아내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잠들었는가왜 어느 별은 하얗게 웃으며 피어나고왜 어느 ..

충옥(蟲獄) - 장이지

어느 날 나그네가 내게 왔다. 마분지 날개를 달아매 주었다. 해바라기 꺾어들고 노래 부르며 난바다를 헤맸다. 캄캄한 밤 울음으로 빛나는 야경, 그 속의 키 작은 사람들을 보았다. 산동네 얼음 언 계단을 흰 꽃 토하며 오르내리던 가파른 목숨들을. 광막한 우주에 한 점 노래가 퍼지는 겨울이 가고, 별이 다시 꽃으로 내려와 앉는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다시 겨울이 가고, 나는 노래에 걸신들려 떠도는 조그만 제비였는제 나그네는 가뭇없이 떠나고......   얼마나 걸어야 이 무궁(無窮)의 길은 그칠까.  얼마나 더 걸어야 발이 사라지고 별이 될까 누리알 차갑게 튀는 길을 걷다가 문득 옛집에 이르러 애끊음이여. 지붕은 무너지고 아무도 없는 방에 그것이 있었다. 눈도 없고 다리도 없이 이상하게 처연한 몸부림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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