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리뷰/시와 글

[나는 어떻게 쓰는가] 안수찬 기자

zophobia 2025. 1. 29. 13:29

 

 글은 자아의 노출이다. 그것도 불특정 다수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쓰기가 두렵다. 글에 담긴 자신을 누군가 폄훼할까 두렵다. 어떤 글도 독자를 한정짓거나 특정할 수 없다. 누가 읽을지 알 수 없고, 의도할 수도 없으므로, 글쓰기는 때로 위험천만한 모험이 된다. 불특정 독자가 나(의 글)를 간단히 오해할 것이다. 두려운 나머지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일기를 쓸 때조차 미래의 독자를 의식한다. 근본에 있어 글은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이지 않다.

 

 동시에 사람들은 글쓰기를 갈망한다. 그것은 불멸에 대한 동경이다. 삶은 찰나의 시공간에 붙잡혀 있지만, 글은 그 올가미를 벗어버릴 수 있다. 글은 소통의 경계를 붕괴시킨다.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죽고 난 다음까지 나를 알릴 것이다. 글은 기본적으로 내가 주도하는 미디어다. 글 쓰는 이가 글 읽는 이를 지배한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아를 거리낌 없이 펼쳐 보일 광대한 영지를 갖는 일이다. 이 영토 안에서 나는 자유롭고, 그 땅에서 나는 세계의 주인이다. 글에 비하자면 말은 덧이 없다. 기껏해야 가족·연인·동료에게 나를 표현할 뿐이다. 매스미디어를 장악한 웅변가가 아니라면, 뭇 사람의 말은 공중에 흩어져 자취조차 남지 않는다. (실은 웅변조차 글로 옮겨야 ‘역사’가 된다) 글은 불멸의 미디어이므로, 사람들은 찰나의 삶을 글에 담으려 안달한다.

 

 서로 충돌하는 공포와 열망을 잘 조절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는 자아 노출의 공포와 열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일이다. 글을 지탱하는 것은 그래서 문장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자아가 글의 정수다. 글은 ‘나’의 문제다. 김구의 <백범일지>,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등이 훌륭한 것은 그 문장과 별 상관이 없다. 그들은 문장연습을 거듭한 문필가도 아니다. 그들의 자아가 훌륭하므로, 이를 그대로 드러낸 그들의 글도 훌륭하다.

 

 여기에 이르러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 분명해진다. 글에 담기는 자아를 훌륭하게 갈고 닦으면 된다. 우선 10년쯤 면벽참선하며 수양하자. 그 다음 10년쯤 수만 권의 장서를 독파해 교양을 쌓자. 나머지 10년쯤 여러 직업을 거치며 연륜을 얻자. 그렇게 30년을 고행한다면 어지간한 자아에도 향기가 날 것이며, 그 향기가 밴 글도 읽어볼만 할 것이다. 물론 이 방식의 치명적 약점이 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언제쯤 고행이 끝날지 정확한 기약도 어렵다.

 

 인내가 부족한 이들을 위한 둘레길이 있다. 게다가 그 길의 초입을 대부분 겪어봤다. 자아 대신 타자에 주목하는 방식이다. 자아와 대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반면 타자를 살피는 일은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자아를 노출하는 일에 비해 두려움과 창피함이 덜하다. ‘남’의 문제를 응시하면 어마어마한 고행을 건너뛰어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남’의 문제가 제 삶에 왈칵 달려드는 때를 사람들은 간간이 겪는다.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할 때,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낼 때, 누군가 자신을 해코지할 때, 한없이 증오할 때, 사람들은 가슴이 저리거나 치가 떨리거나 심장이 북받친다. 바로 그때, 사람들은 사무치게 글이 쓰고 싶어진다. 살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 겪는 그런 밤이면 명치에서 토악질처럼 글이 솟구쳐 오른다.

 

뭇 사람들은 이런 일을 평생 몇 번만 겪는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이런 일을 거의 매일 겪는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과 사랑하고 실연하며, 투쟁하며 갈등한다. 타자로 인해 자아가 매일 뒤흔들린다. 매일 그들은 토악질하며 글을 쓴다. 이 대목에 이르러 글은 ‘자아’를 넘어서는 ‘타자’의 문제다. 글쓰기는 타자에 대한 감응의 표현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삼라만상을 향한 감성의 더듬이를 벼려야 한다. 주변의 이웃, 그들을 엮는 관계에 민감하게 감응해야 글을 쓸 수 있다.

 

 세상 모든 길은 서로 만난다. 자아를 성찰하는 길과 타자에 감응하는 길은 어느 경지에 이르러 서로 섞이고 스민다. 둘의 팽팽하고도 적절한 긴장 가운데서 글이 탄생한다. 공교롭게도 저널리즘은 정확히 그런 글을 지향한다. 문학의 글(소설), 과학의 글(논문), 일상의 글(일기) 등과 비교된다. 모든 글은 자아와 타자가 교감한 결과이지만, 소설·논문·일기 등에서 자아는 종종 타자를 압도한다. 저널리즘의 글, 즉 기사에서 균형추는 반대로 기운다.

 

 기사에는 자아가 (적어도 노골적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타자, 관계, 공공이 기사의 주어가 된다. 기사를 쓰면 더 깊이 더 자주 타자를 응시할 수 있다. 삼라만상에 감응하는 더 예민한 더듬이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기사에서 자아 노출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는 (본능적으로) 공공의 문제 뒤에 숨은 자아(기자)를 알아차리고, 그 인격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꽃을 뿌린다. 타자를 응시하는 기사는 소설·논문·일기보다 더 광활한 광장에 필자를 노출시킨다. 기사는 자아와 타자가 서로 섞이고 스미는 전형적 글쓰기다.

 

 이 글에서 나는 기사 쓰기를 빌려 글쓰기를 설명할 것이다. 자아와 타자가 어떻게 교감하고 충돌했는지 보여줄 것이다. 타자를 통해 어떻게 자아를 노출했는지도 보여줄 것이다. 기사는 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글 쓰는 모든 이가 즐겁게 뛰어들 수 있는 하나의 장르다. 직업이 기자건 아니건, 글쓰기의 공포와 열망을 갖춘 사람 누구에게나 작은 영감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최근 2년여 동안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실렸던 기사를 주로 인용하겠다. 훗날 돌이켜 반드시 창피해질 글이지만, 지금으로선 내가 가닿은 최신의 지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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